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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아파트 단지에서"
제가 살던 아파트 단지 담장 너머에 어느 날부터 크레인 한대가 와서 흙을 파고 땅을 판판하게 만드는 작업을 아침 일찍부터 하고 있었어요. 듣자 하니 족구장을 두 개인가 세 개를 만들 계획이라고 하더군요. 그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트 반장님이 반상회를 소집했습니다. 제 아내도 거길 다녀오더니 족구장이 들어오는걸 막기로 했다는 거예요. 주민들의 의견이나 승락도 없이 멋대로 족구장을 세우는데, 그냥 두면 먼지나 소음도 만만치 않을거라구요. 괜히 아파트 값도 추락할 수 있다나요?
솔직히 저는 별 관심도 없었어요. 왜냐면 아파트 담 밖에 있는 땅이기도 하고, 누가 개인 땅에 허락을 받고 하는거라면 반상회에서 막을 길도 없고, 시간 낭비는 물론 괜한 싸움만 벌일 수 있으니까요.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내를 말렸어요. “그거, 이미 늦었어. 저렇게 공사를 시작하는데, 어케 막아?” 게다가 아내에겐 말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집 앞에 족구장이 생기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.
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주차장 밖에 우리 아파트 라인 여자분들이 몽땅 크레인 앞을 가로막고 시위하고 있더라구요. 공사를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. 그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저는 속으로 비웃었어요. “저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?” 우리 동네 여성들의 열심이 뻔한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습니다.
그런데 저의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. 저희는 306동에 살고 있었는데, 307동에 어느 국회의원이 산다는 거예요. 그런데 우리 동 라인의 여성들이 그 집을 찾아갔다는 겁니다. “당신도 여기 주민이니까, 좀 도와 달라” 말이죠. 저 같았으면 그분까지 찾아가는 배짱이 없었을텐데 말 입니다.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아파트 앞에 족구장이 들어오는 것 좀 막아 달라고 국회의원을 찾아가요?
약 이틀 정도 지난 것 같아요. 크레인도 공사 차량도 모두 다 자취를 감추었구요, 공사는 멈춰졌습니다. 엘리베이터 안에 보니까 한쪽에 안내 문구가 붙어 있어요. 족구장 공사를 포기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. 저는 그 때 ‘우먼 파워’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. 몇 사람만 마음을 모으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. 저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.
어려움은 혼자 풀 수 없는 것 같습니다. 크든 작든 말이죠.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도 아마 그런 것 같아요.
나 혼자는 대단한 일을 하지 못해도,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킬 때 힘이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. 요즈음 모두 지치기 쉬운 것 같아요.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기억하고, 의지하고, 기도할 때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는 신비한 일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. 저는 그런 경험이 있거든요.
(김요한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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